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문단 편집) == 영향과 평가 == 여러 면에서 [[르 코르뷔지에]]와 비교된다. 도시와 기계를 찬양하며 대량생산에 의한 효율을 주장했던 코르뷔지에와 달리 라이트는 자연을 열렬히 찬양했다. 단순히 도시를 좋아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싫어했다. 라이트는 더욱 장인적이고 맞춤형 생산에 의한 다양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코르뷔지에가 이후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처럼 라이트는 자연적인 건축, 환경적인 건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동양의 건축기술과 양식을 서구에 알린 공도 있는데, 한국과 일본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온돌]] 난방을 경험하고 [[https://cafe.daum.net/skyscrapers/IOul/9141?svc=cafefavoritearticle|서구식 보일러와 접목]]'''시킨다. 1916년 일본 제국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귀족의 조선관에서 온돌을 [[https://realty.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25/2017022501006.html|체험]]한 뒤 Herbert Jacobs house를 1937년 만든다. 이 조선관은 원래 [[경복궁 자선당]]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당시의 일본 귀족 부호였던 오쿠라 키하치로가 뜯어가(...) 자기 집에 세웠던 것. 이후 자선당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뒤 1996년에야 주춧돌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다만 주춧돌 자체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10601032530074004|보존]]한다.] 원래 자리에 복원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791890?sid=110|기사]] 또 유럽식 보일러를 이용한 온수 복사난방과 한국의 온돌 기술을 접목시켜서, [[유럽]]의 난방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결국 유럽 최초의 바닥난방 시공표준안이 1980년 개발된다. [[바닥난방]] 문서 참고. 주거계획의 측면에서도 아파트를 선호했던 코르뷔지에와 달리 라이트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자동차, 비행기를 1~2대씩 소유하고 넓게 퍼져 사는 삶을 이상적인 도시 생활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총집합된 [[https://paleofuture.gizmodo.com/broadacre-city-frank-lloyd-wrights-unbuilt-suburban-ut-1509433082|그의 구상안(Broadacre City)]]은 당대 빠르고 효율적인 주거단지의 보급에 알맞는 [[근린주구]](C.A.Perry)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제인 제이콥스를 비롯한 도시 이론가들에게 교통체계에 대한 미고려, 비현실성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라이트의 업적이 부풀려졌다는 의견도 있는데, [[유럽]]의 건축 역사에 비해 내세울 게 적던 당시 [[미국]]이 자국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그가 고평가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만 고평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업적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명으로 불릴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